홍성 집단지성의 농업팀 이윤선 님은 농업이 작물을 생산하는 것으로만 비춰지지 않도록
농업과 농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매력들을 찾아내고 콘텐츠로 풀어내는 일을 합니다.
찰옥수수
2017년 6월 20일, 지금 인터뷰를 하는 이곳 이 자리에서 찰옥수수와 토마토 파스타를 해 먹은 날입니다. 홍성이라는 곳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은 첫 해였어요. 토마토와 옥수수가 나오는 계절이었는데 그 날 먹었던 옥수수는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맛있었어요. 옥수수는 따자마자 당분이 전분으로 변하거든요. 원래도 좋아하던 찰옥수수를 갓 따서 쪄 먹으니까 그 전에 먹었던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였어요. 이 옥수수는 여기에서만 먹을 수 있으니까 ‘내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면 아무리 갓 따서 나한테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텐데, 내년에도 이 옥수수를 한 번 더 먹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나에게 첫 농사는
처음 농사를 지으면서 몸이 너무 아팠어요. 한 번도 몸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가 종일 농사를 지으면서 몸을 쓰니까 체중도 10kg 정도 빠지고 몸에 힘이 없었어요. 게다가 수확한 못난이 채소들도 그날그날 다 먹어야 버리지 않으니까, 집에 가서도 쉴 수가 없었어요. 이곳에서 그 채소들을 먹기 위한 일을 다시 시작해야 했죠. 그 때는 농사를 배우던 시기여서 그 과정이 '나의 일'이라는 생각을 못했거든요. ‘이곳을 떠나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어요. 그렇게 힘들 때 그 옥수수를 먹지 않았다면 지금 홍성에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날이 제 로컬기념일입니다. 요즘은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찰옥수수보다 초당옥수수를 많이 심어서 조금 슬퍼요.(웃음)
당근
충남 홍성을 어딘지도 모르고 다녀간 적이 있어요. 12년 전이었는데, 지금 같이 재배를 담당하고 있는 박건우 선생님을 우연히 뵈었던 기억이 나요. 그 후 몇 해가 흘러서 대학 졸업을 앞두었을 쯤, 동료와 같이 홍성에 교육 사전답사를 하러 갔는데 박건우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 거예요. 정말 반갑고 신기한 인연이었어요. 일정을 마무리하고 시간이 남아서 선생님의 농장에 구경을 갔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당시에 저는 음식에 관심이 많았고, 농부시장 마르쉐에서 공간 세팅팀 활동을 하면서 농부도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채소에 대해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밭에서 본 당근은 잎도 달려있고 엄청 진한 주황색이라서 그동안 봐온 당근과 완전히 다른 거예요. 누가 뒤통수를 때린 것 같았어요. 내가 먹는 음식을 내가 알고 먹는 게 아니라는 어떤 충격? 그날 농장에서 당근을 보고서 ‘내가 농사를 지으면 이건 그동안과 좀 완전 다른 일이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농사와 유학
예대 조소과를 다니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었어요. 조형물이나 오브제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이 분야에서 먹고 살아가려면 외국에 가는 수밖에 없다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거든요. 제가 배우던 분야는 그림을 그리든 디자인을 하든 무언가를 포장하는 일이었고 누군가 인정해주기 전까지는 결과물들이 계속 쓰레기가 되더라고요. ‘나는 계속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이어졌어요. 그러다 우연히 지인을 따라 왔던 홍성에서 당근을 보게 된 거예요. 작물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건 누구나에게 다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이 일을 하면 내가 조금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홍성에 내려오게 됐습니다.
농촌을 해석하다
저는 홍성 집단지성에 참여하면서 채소생활이라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어요. 처음에 이 채소생활을 시작한 것도 '채소는 건강하니까 먹어야 해.'라는 생각처럼 당위적으로 채소가 해석되는 것이 아쉬워서였어요. 제가 발견한 채소의 매력은 '아름답다'였거든요. 너무 예쁘다. 제가 당근을 보고 색이 아름답다고 느꼈듯이 사람들에게 이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어요. 먹는 것 외에 채소의 색을 이용해서 크레용이나 물감을 만들어 본다든지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있어요. 물감이 묽은 수채화처럼 표현되고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창작활동도 가능하더라고요. 앞으로는 집단지성 동료들과 함께 식경험 디자인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음식을 먹는 행위와 과정을 디자인해보고 싶어요.
비로소 저녁 있는 삶
연고가 없는 홍성에 온 뒤로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어요. 저녁 있는 삶을 보내면서 사람들과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꿈꾸고 내려왔는데 오히려 농사를 지으면서 시간에 쫓기니까 원래 하려고 했던 것들을 못하고 있더라고요. 음식에 관심이 많아도 제가 먹기 위해서는 점점 요리를 하지 않게 되었고요. 그런데 집단지성을 하면서 꿈이 선명해지고 있어요. 친구들과 '우리 어떤 것을 더 해볼까?' 이야기하면서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한 고민을 하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우리 마을, 홍성
살기가 좋은 곳이에요. 그런데 제 눈에 놀러 오기에 아름다운 곳은 솔직히 아닌 것 같아요.(웃음) 아름답고 경치 좋은 곳들은 다른 지역에도 많이 있으니까. 제가 여기에 살아봐도 좋겠다고 생각한 건 이곳의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공간을 만들지 고민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들었을 때였어요. 홍성은 유기농이 최초로 시작된 곳이기도 해서 주민 분들에게 엄청 큰 자부심인데 그런 어른들과 대화를 나눌 때 확신이 들었어요. 이런 어른들이 있는 마을이면 나도 살아볼 만하겠다고. 홍성은 좋은 어른들이 살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에요.
타샤 튜더 할머니
어렸을 때부터 '타샤 튜더'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농사를 지어보거나 정원을 가꿔본 적도 없고, 학교 다닐 때 강낭콩 키우기를 하면서 제 건 싹이 잘 안 텄거든요.(웃음) 그런데 자급자족의 삶을 사시는 할머니를 보게 된 후부터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 생각하게 된 거죠. 이 할머니의 삶에는 정원이 엄청 큰 부분이어서 할머니를 떠올리면 아름다운 정원이 함께 떠오르거든요. 게다가 직접 바느질도 하고 정원에서 가꾼 재료로 요리를 하 사시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어요. 저를 이곳 홍성에 오게 한 가장 깊은 무의식을 담당하는 분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 처음 이 책에 나오는 꽃들이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건 다 알고 길러봤던 꽃들이에요. 방금 열어보고 깜짝 놀랐네요. 이제는 할머니의 삶이 어떤 과정이었을지 알아요. 할머니는 이 일을 정말 사랑하셨던 거예요.
로컬기념일|<로컬라이프클럽 begins> 캠페인의 일환으로 마을 청년들이 우연과 인연을 계기로 로컬을 보금자리로 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결심한 날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행정안전부 청년마을만들기 지원사업 선정 마을에서 추천한 인물의 인터뷰가 담겨있습니다.